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사레 보르자 (문단 편집) == 평가 == [[니콜로 마키아벨리]]는《[[군주론]]》에서 체사레를 유능하면서도 냉혹하고 추진력과 결단성을 갖춘 군주의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의 실례로 체사레의 행동력과 결과를 예로 든 것일 뿐, 체사레가 마키아벨리의 가장 이상적인 군주상인 것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가 체사레의 이런 저런 약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호의적으로 평가한 것은 당시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다들 말뿐이었고 그나마 실제로 계획, 행동을 한 사람이 체사레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교황령을 '''멸망'''시킬 수 있는 인물로 생각했다는 주장도 있다. 본래 마키아벨리는 [[교황령]]이 이탈리아 통일의 중요한 방해물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체사레와 친부인 알렉산데르 6세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교황령을 세속 군주의 영토로 만들려고 했다. 즉, 체사레가 교황령을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 기반을 갖추는데 성공한다면, 교황령은 더 이상 [[가톨릭]]이란 종교의 상징성이 없는 보르지아 가문의 '''일개''' 세속 국가로 바뀔 것이고, 이는 기존의 교황령이 해체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체사레를 고평가했다는 것.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이다. 역사상으로는 [[로마]]인 이후 [[베네치아]]인, 로마인, [[피사]]인이 아닌 최초로 [[이탈리아인]]이란 개념을 심어놓은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동인녀]] 의혹을 받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저서《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읽어보면 된다. 체사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영국]] 역사가 새러 브래드퍼드가 쓴 체사레 평전인《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를 사로잡은 군주론의 모델》을 추천한다. 사학계에서 나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순혈주의[* 현재나 다른 나라 출신 [[교황]]이 나오는 거지, 당시만 해도 [[교황]]은 [[이탈리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교황은 로마 총대주교니까. [[베네딕토 16세]]까지 265명인 [[교황]] 가운데 [[로마]] 출신만 해도 108명이고, [[이탈리아]] 출신만 해도 81명으로 70%를 넘는다. [[가톨릭]] 역사, 특히 [[교황]]의 권한이 강해진 [[중세]] 이후 역사에서는 비(非) [[이탈리아]]계 교황은 [[아비뇽 유수]]기([[프랑스]] 출신 7명, [[대립교황]] 제외)를 제외하고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다. [[아비뇽 유수]] 이후 교회가 통합되자 스페인 출신의 [[알렉산데르 6세]] ^^(1492년 ~ 1503년)^^ 이후 [[20세기]]까지 비(非) [[이탈리아]]계 [[교황]]은 [[네덜란드]] 출신 [[하드리아노 6세]] ^^(1522년 ~ 1523년)^^ 단 1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1년을 재임했다. 이런 관행을 깨고 정말 [[파천황]]적으로 등극한 게 [[1978년]] 즉위한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다. 비(非) [[이탈리아인]]으로는 500년, [[동유럽]] 출신 교황으로 따지면 [[달마티아]]([[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의 [[카이오(교황)|카이오]] 교황 ^^(283년 ~ 296년)^^, [[요한 4세]] ^^(640년 ~ 642년)^^을 제외하곤 최초다.]에 대한 희생양이라는 측과 [[율리오 2세]]의 [[교황령]] 재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줄타기 외교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교황령 자체의 군사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기에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스페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인정하지 않은 스페인의 남부 이탈리아 영유를 인정하는 병크까지 저질렀고,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이 결혼동맹을 맺으면서 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꿈은 완전히 붕괴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위대한 업적'''은 커녕 '''업적'''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율리우스 2세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상의 전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가 워낙에 악명 높은 탓이다.]은 체사레가 초석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측도 존재하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주창한 [[위버멘쉬]]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며 언급한다. 도덕적인 [[성인군자]]가 아니라 체사레 보르자 같은 사람이야말로 위버멘쉬라 남겼다. 온갖 불미스러운 의혹과 아버지의 빽만 제외하면 단기간에 [[이탈리아]]의 실권자 중에 한 명이 된 것을 주목한 것 같다. 묘하게 삼국지의 [[원소(삼국지)|원소]]와 닮았다. 명문가의 서출이고, 미남으로 유명했으며 [[권모술수]]에 능했고, 의외로 자기 백성들한테는 인기 있는 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원소(삼국지)|원소]]라는 인간군상으로 비교한다면 정사쪽보다는 연의에서 표현되는 치졸하고 소인배 기질을 가진 원소 쪽에 가깝다고 할 수있다. 삼국지 정사의 원소는 정치적 면모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체사레와 감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죽어서도 하북의 백성들은 물론 한나라 안에서 칭송받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